Sunday, July 15, 2012

나의 1999년 북한 여행기: 발코니의 닭 그리고 욕조 속의 돼지…

(글/ Dr. Leonid Petrov 시드니대 교수; 번역/정리: 김혜선)

북한 주민들이 혹독한 가난과 기근에 시달리고 있으며 심지어 아사하고 있다는 소문으로 북한의 경제상황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소문이 진실일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면 직접 북한을 여행하고 느껴보는 건 어떨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불완전한 공산주의 정신’과 연결돼 있는 북한의 놀라운 현실을 여행하는 것만으로도 짧은 여행에 비싼 경비를 지출하는 것쯤은 가치 있는 일이었다.

여행 스케줄 변경 불가능, 취소는 가능

여행을 준비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입국비자를 받기 위해 국제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역매니저를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나는 단기 유럽 여행을 해야 했다. 유럽 여행을 마치고 북한 최고지도자 생일에 참석하겠다는 내 고집스러운 결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 천 가지 이유를 대며 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

북한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그는 결국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내 북한 방문에 동의했다. ‘북한 방문 후 북한에 관해 좋지 않은 이야기는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북한에서의 여행 동안 모든 계획들은 사전에 논의되고 승인 받는다. 그렇게 결정된 여행 스케줄의 변경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취소는 가능하다. 북한의 여행자들은 숙박 시설을 선택하는데 있어 선택의 폭이 무척 넓은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전기와 더운 물이 나오지 않는 아주 싼 가격대의 호텔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시설을 다 갖춘 고급스러운 호텔에 아주 비싼 숙박비를 지불하고 머물러야 할 것인지 때로 그 선택은 고통스럽기까지도 하다.

후자를 선택한다면 훨씬 더 편안하고 안락한 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 호텔에 머물면서 호주에 있는 친척이나 친구에게 전화를 걸 수도 있지만 1분의 통화요금은 엄청나게 비쌌다. 두 명의 통역 가이드는 언제나 나를 따라 다녔다. 내가 우울한 기분이 들어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어디든 상관없이 늘 나를 따라 다녔다.

외국에서 온 여행객들에게는 최고의 교통수단이 제공된다. 베이징과 평양간 초 고속 열차 안의 침대 칸, 테이블 위에 놓여진 미네랄 워터, 식당칸의 벽에 걸려있는 최고지도자 사진들은 나를 러시아 스탈린 시대 영화의 한 장면 속의 엑스트라처럼 느껴지게도 했다.

화려하고 웅장한 박물관 매우 인상적

평양에 도착을 했을 때 연료 (굶주린 나라의 실제적인 보물과도 같은) 탱크를 가득 채운 벤츠와 볼보, 그리고 닛산의 신형차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 탈 수 있었다. 리무진을 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리무진이 동아시아 전체 중에서 가장 넓은 도로를 달리는 유일한 차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해도 놀라지 않아야 한다.

오랫동안 강력한 북한의 주 에너지 공급원이 돼온 중국과 러시아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복당하고 그들의 기름과 전력라인을 꺼버렸을 때 북한의 공기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했다.

모든 산업은 멈췄고 한 무리의 노동자들은 캔버라에서처럼 떼를 지어 자전거를 타고 출근 했다. ‘환경보호관점’에서 북한의 노동자정책은 감탄으로밖에는 묘사될 수 없었다.

평양을 방문한다면, 최고의 기억을 남기기 위해 화려하고 웅장한 김일성 박물관을 방문하는 특별한 기회를 꼭 가지라고 권하고 싶다. 김일성, 그리고 그의 아들 김정일 또 그의 아들 김정은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미래의 그 아들까지 북한의 혁명전통의 왕조를 기념하기 위한 박물관이었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전쟁의 역사가 있는 승리의 애국전쟁기념관은 북한이 한국전쟁의 범인이며 악의 정체라는 것을 말해주듯 설계돼 있었다. 중앙역사박물관은 한국 역사가 세계에서 가장 진보돼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했다.

단군의 무덤은 특별히 흥미롭게 느껴졌다. 김일성은 북한의 연구학자와 고고학자들의 지침대로 한국의 신화가 됐던 최초의 왕의 골격을 출토했다. 5011년 전 한국인들의 조상인 단군의 유적은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한가지 더 인상 깊었던 것은 북한 주민들이 그들이 키우는 동물이나 애완동물을 대하는 태도였다. 생계의 어려움은 강제로 도심의 아파트에서도 가축 및 가금류를 키우도록 명령돼 있었다.

개는 고급 민속 레스토랑에서 요리되고…

농촌지역뿐만 아니고 도심에서도 염소와 닭 그리고 돼지는 가장 일반적으로 길러지는 동물이었다. 마을을 산책할 때에도 북한 주민들은 그들이 키우는 염소가 피곤하지 않도록 팔로 안고 다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고 염소는 담배를 먹고 도심의 주민들은 발코니에 많은 수의 닭들을 키우고 있었다.

일부 부유층의 사람들은 욕조에 돼지를 키우고 있었지만 평양을 방문했던 외국 관광객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통적으로 사람들에게 특별한 귀여움을 받고 있는 개는 평양의 고급 민속 레스토랑에서 요리되고 있었다.

북한을 여행하는 동안 특별히 행복했던 시간이 두 번 있었다. 중국과 북한의 국경을 건너게 됐을 때 북한에 입국할 수 있도록 입국허가서를 받았던 일과 여행을 마치고 여권을 돌려받게 돼 안전하게 북한을 떠 날 수 있었던 일이었다.

흥미로운 일은 흔히 ‘자본주의국가’로 불리는 서방국가로부터의 여행객들 중 호주에서의 여행객이 가장 많았다는 것이었다. 1975년 호주는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97년에서 1998년까지 다섯 명의 북한 유학생들은 ANU에서 ‘자본주의 경제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1999년 5월 북한으로부터의 공식방문자들이 캔버라를 방문했다. 국제적으로 링크된 외교관계를 개선하고 미래에 관한 몇 가지 인도적 원조를 구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태국에서 북한의 인사들은 호주의 동료들에게 공식적으로 접근하기도 했다. 이렇게 나간다면 그 언젠가 캔버라 거리에 북한으로부터 온 여행객들로 가득하게 될 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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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this text in English here... "CHICKENS ON THE BALCONIES, PIGS IN THE BATH TU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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